청자란 유약 속의 철이 약간 섞인 그릇을 만든 뒤 철분 1~3%가 함유된 콩기름을 바르고 섭씨 1250~1300도에서 염분을 줄여 굽다가 청록색으로 변한 자기를 말한다. 중국 한나라 때 절강성 월주에서 원시청자가 처음 만들어졌으며, 5세기부터 6세기까지 점차 발전하여 당나라를 거쳐 송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부터 한국 청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는 10세기 후반 고려의 중앙집중화로 떠오른 중국 신지배층의 중국 청자 수요와 중국 청자의 영향 때문이다. 9세기 후반이나 10세기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고려청자가 11세기 후반에 개발되어 제빵의 형태와 무늬, 방법 등에서 고려의 독특한 특징이 발견되었고,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는 대규모 가마터가 설치되었다. 12..
그러나 이 성곽이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알기 위해서는 위의 역사적 사실을 모두 언급할 필요는 없다. 벽을 찾아가 눈으로 바라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노령으로 인해 성곽의 많은 부분이 무너졌지만 동남쪽 성벽은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벽돌로 쌓은 듯한 암석벽이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산등성이를 따라 산등성이를 따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것이 떨어진 곳조차 장엄하니, 보는 사람이 먼저 말문이 막힐 것이오." 이런 것들을 쌓아올린 자들과 이들을 공략해야 했던 자들의 의지와 끈기, 그리고 그들의 시대적 발상이 그 다음이다. 거의 수직으로 세워져 있는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13~20m에 이르며, 꼭대기에는 폭이 8~10m 정도 된다. 워낙 크고 높았기 때문에 하중이 커서 모퉁이..
진흥왕 15년(554년) 백제 성왕이 대가야군과 연계하여 관산성(지금의 옥천)을 침공했을 때 처음에는 고전하던 신라군이 성왕왕을 죽이고 백제군 3만 명을 죽였다. 관산성의 승리로 신라는 전년에 나제동맹을 깨뜨리고 백제에서 빼앗긴 한강 하류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이때부터 삼년산성이 백제의 공격의 최전방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태종 7년(660년) 신라는 당나라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사비성을 부수고 의제의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백제 유민군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20여 개의 성도가 반란을 일으켜 유민군에 대응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왕문도를 웅진도로 급파하여 태종무열왕이 왕문도를 만났다. 이후 헌덕왕 14년(822년)에 웅천주(공주) 도지사를 지낸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