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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성곽이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알기 위해서는 위의 역사적 사실을 모두 언급할 필요는 없다. 벽을 찾아가 눈으로 바라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노령으로 인해 성곽의 많은 부분이 무너졌지만 동남쪽 성벽은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벽돌로 쌓은 듯한 암석벽이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산등성이를 따라 산등성이를 따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것이 떨어진 곳조차 장엄하니, 보는 사람이 먼저 말문이 막힐 것이오." 이런 것들을 쌓아올린 자들과 이들을 공략해야 했던 자들의 의지와 끈기, 그리고 그들의 시대적 발상이 그 다음이다.


거의 수직으로 세워져 있는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13~20m에 이르며, 꼭대기에는 폭이 8~10m 정도 된다. 워낙 크고 높았기 때문에 하중이 커서 모퉁이를 돌면 4중 계단으로 기지를 쌓아 힘을 얻었다. 성곽은 동남, 북동, 서북의 봉우리를 병풍처럼 연결하고 내부에 계곡을 이루는 포곡식 성곽이다. 성의 물은 서쪽으로 흘러 낮은 계곡으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다. 둘레는 약 1.7km이며, 안에는 논과 밭, 집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텅 비어 있다. 성 안에 마을이 있을 때는 마을을 세 살이라고 하고 성 밖에 있는 마을을 성의 기지로 불렀다.


성곽의 벽은 구멍이 뚫린 바위의 판자판으로 지어졌다. 하단에 기초 공사를 한 후 두께를 하나씩 쌓아올리고, 우물 모양으로 하나씩 수직으로 하나씩 쌓아 올려 윗부분의 무게가 고르게 분산되도록 했다. 동쪽과 서쪽 성벽은 바깥쪽에 돌을 쌓아 쌓았고, 안과 남쪽 성벽은 양쪽에 돌을 쌓아 쌓았다. 건물 벽의 갈라진 틈새에 작은 돌들이 가득 차 있어 얇은 돌들이 오래도록 버틸 수 있었다.


문은 동서남북 4곳에 위치했으며, 보통 너비가 4~5m이다. 지리적 특징을 바탕으로 동문과 서문에 많이 쓰인다. 요즘은 사람들이 서문을 드나든다. 서문 근처의 성벽은 최근 몇 년 동안 완전히 복원되었으며, 성문이 있던 네모난 구멍이 있는 기둥 받침대 등 성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80년 7월 4시간에 걸쳐 337㎜를 쏟아 부은 보은지방의 집중호우 때 서문좌석에 물이 쏟아져 바닥을 씻는 등 돌덩어리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