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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15년(554년) 백제 성왕이 대가야군과 연계하여 관산성(지금의 옥천)을 침공했을 때 처음에는 고전하던 신라군이 성왕왕을 죽이고 백제군 3만 명을 죽였다. 관산성의 승리로 신라는 전년에 나제동맹을 깨뜨리고 백제에서 빼앗긴 한강 하류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이때부터 삼년산성이 백제의 공격의 최전방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태종 7년(660년) 신라는 당나라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사비성을 부수고 의제의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백제 유민군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20여 개의 성도가 반란을 일으켜 유민군에 대응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왕문도를 웅진도로 급파하여 태종무열왕이 왕문도를 만났다.


이후 헌덕왕 14년(822년)에 웅천주(공주) 도지사를 지낸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데 대해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 연호경운이라 불렀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신라 9개국 중 무진주(광주), 완산(전주), 청주(진주), 사볼주(상주) 중 4개국을 장악하고 국원영(충주), 서원영(청주), 금광영(김해) 등 각 군수를 예속시켰다. 왕의 진압군이 출동하자 김헌창은 여러 곳에 병력을 배치하고 저항하였는데, 성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삼련산성이었다. 삼논산성에 진을 치던 군대가 신라군에게 패한 후 반란군은 곧 진압되었다. 태조 원년(918년)에 후백제 견훤왕이 고려의 국경을 넘었으나, 태조 자신이 후백제가 점령한 3년 성을 치지 못하고 청주로 물러났다.